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프 전쟁 (문단 편집) ==== 승리 임박 ==== 슈워츠코프 장군은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상태라서 정리를 시작하는 한편 전설의 기자회견을 열어서 당당하게 다국적군이 승리했음을 선언했다. 그후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최소 2만 명의 전사, 실종자를 포함한 10만여 명의 사상자라는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 딱 떨어지는 100이란 숫자가 미디어 홍보에 효과가 탁월한 것이라는 파월 합참의장의 제안이였다. 이것을 부시 정권이 받아들이면서 처음부터 지상전 작전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군인이지만 정치감각이 남달랐던 파월 장군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이자, '''[[전쟁론|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이다.]만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슈워츠코프는 공화국수비대를 확실하게 조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정에 대해서 다소 아쉬워했지만 슈워츠코프도, 중부군 부사령관 켈빈 왈러도 [[문민통제|백악관에 직접 맞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전을 수용했다. 당시 바스라로 탈출하는 도로가 지상군 부족으로 차단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화국수비대를 모조리 작살낸다는 초기 계획은 완전히 이행되지 못하고 최소 이라크군 4개 사단이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이 퇴각하던 4개 사단을 끝장내는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중부군에선 쓴 입맛을 다셨다. 이라크군을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은 화려한 전과 때문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대에선 이라크 공화국수비대가 궤멸되지 않았다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시 역시 정치적 이유로 지상전을 빨리 끝내버렸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자회견에서 걸프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다르다고 말했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쿠웨이트 일대에 투입된 침공군은 말 그대로 소멸되었다. 본토 역시 초토화되었으며 방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방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침공 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 만에 소수의 전투기와 [[ZU-23]]같은 구식 대공포,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북한군]]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 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의 탐지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의 [[파나비어 토네이도|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 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한 [[미라주 F1]]은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EF-111 조종사의 계략에 낚여 그대로 지면에 들이받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이라크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가량이 이 한 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생화학 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미국이 화생방(CBRN) 공격을 얻어맞으면 핵으로 보복하겠다고 이미 공표한지라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스커드 공격도 생화학 무기가 아닌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사용했다. 다만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 무기를 자주 사용한 전력이 있고 또 후세인이 완패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당시 서방에서 독재자는 기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후세인 본인은 자기 지지세력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권력을 잃은 뒤에도 그냥 잡혀죽고 순교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지, 화학무기 따위는 손대려고도 들지 않았다.] 다국적군도 이라크군이 화학 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